안녕하셔요
오늘도 대학생 때 제출한 과제를 들고 왔습니다
작가 탐구의 실제라는 강의에서 봉준호 감독을 분석한 적이 있었네요 허허
분석 작품은 기생충과 플란다스의 개입니다- 기본적으로 봉준호 감독이라는 큰 틀 안에서 두 작품이 가지는 공통점과 차이점을 분석하려 했어요. 아무래도 캐릭터명을 언급하고 있다보니 두 작품을 다 보아야 이해가 빨리 되겟구만요. 배고프니가 빨리 올리고 갈래잉

영화 감독은 자신의 세계관을 영화로 구현해내는 직업이라고 생각합니다. 영화가 곧 감독의 세계이자 나라인 것인데, 이 때 자신의 가치관을 보여줄 뿐 해답은 주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저는 줄곧 이에 부합하는 감독으로 봉준호를 말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을 제외하고 제가 생각하는 그의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통합체적으로 ‘사회 문제와 소시민의 병치로 알아보는 보편성’입니다. 또한 계열체적으로 ‘중심 소재 외 세계관을 관통하는 상징물의 등장’이 있습니다. 위 특징을 바탕으로 ‘기생충’과 ‘플란다스의 개’를 분석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두 영화의 공통점은 ‘상징물’, ‘소시민으로 알아보는 사회 문제’, ‘인간의 보편성’ 세 가지입니다. 먼저 기생충에서 사회와 소시민은 재력에 따라 수직구조를 이루는 사회와 하위계층의 인물들로 나타납니다. 이에 드러나는 보편성은 결국 모두가 수평 관계이고, 같은 냄새를 풍긴다는 것입니다. 상위계층 박사장이 맡는 냄새는 대중교통인 지하철 냄새인데 이는 곧 상위 계층을 제외한 모든 이가 기생충임을 뜻합니다. 하지만 박사장보다 높은 계층의 사람은 박사장의 냄새 또한 맡을 것이므로 박사장과 기택의 수평을 알 수 있습니다. 다음의 상징물은 보통 사람이 신경쓰지 않을 물건에 대한 집착으로 찾을 수 있습니다. 기생충의 상징물은 ‘수석’입니다. 수석은 민혁이 기우네에 선물한 것으로 ‘부잣집’에서 왔기에 물난리가 났을 때에도 챙겨서 대피합니다. 귀중품보다 수석을 먼저 챙기는 모습에서 이가 상징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수석은 ‘수직 사회’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은연 중에 구축된 민혁과 기우네의 수직관계, 문광부부를 기생충 보듯 하는 기우네의 수직관계 등 영화 전반에 깔린 수직 사회를 암시하는 장면마다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플란다스의 개에서 나타나는 사회와 소시민은 부정부패를 일삼는 사회와, 욕하면서도 함께하는사람들을 말합니다. 또한 보편성은 궁지에 몰렸을 때 드러나는 인간의 본성입니다. 특히 부패하고 야만적인 인간을 보며 욕하는 사람들에게 그 위선을 벗겨내면 나약한 인간의 본성은 똑같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상징물은 ‘신발’입니다. 신발은 인간만이 자발적으로 신는 것입니다. 때문에 인간의 정체성은 신발에서 온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이러한 신발은 크게 두 장면으로 등장합니다. 끌려가는 노숙자의 벗겨진 신발, 범행을 고백하려 달리던 윤주의 벗겨진 신발입니다. 노숙자는 자신의 본색을 숨기지도, 위선적인 행동을 하지도 않는 있는 그대로의 인물입니다. 때문에 스스로 인간성을 버리지 않으려 끌려가면서도 끝까지 신발을 신경씁니다. 하지만 윤주의 신발이 벗겨진 것은 범행을 고백하는 과정에서 스스로 인간성을 포기한 모습입니다. 없는 줄도 몰랐던 신발을 현남이 찾아주며 타의로 인간성을 되찾고 있습니다. 두 장면 다 일반적으로 신발엔 신경쓰지 못할 상황에서 언급됐다는 점이 상징물의 기준에 부합하고 있습니다.
두 영화의 차이점은 ‘장벽’과 ‘희망적 존재’ 두 가지입니다. 우선 장벽은 영화와 관객 사이의 장벽을 말합니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는 마지막에 의도적으로 현실과의 장벽을 없애는 연출이 많습니다. 영화 살인의 추억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장벽이 없어지면 관객은 몰입이 깨지며 작품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이는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소외 효과’로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위와 같은 장벽의 부재는 플란다스의 개에서만 나타납니다. 직장에서 잘린 현남이 장미와 등산을 하다가 뒤를 돌아 관객을 쳐다보는 장면입니다. 이 때 현남은 극 중 부러뜨린 사이드미러를 들고 있습니다. 거울은 앞서 윤주가 지하실에서 개를 죽이려다 스스로의 추악함을 자각하는 메타포로 사용되었습니다. 거울을 통해 관객에게 영화 속 인물들을 욕하기 전 스스로를 돌아보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것입니다. 감독은 이로써 모두가 동일하게 가지는 본성의 나약함, 추악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기생충의 경우 기우의 독백으로 끝이 납니다. 지하실에 갇힌 아버지를 찾아가는 상상을 하며 기다려 달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때 기우의 눈은 명백하게 허공을 바라보고 있어, 관객은 끝까지 영화를 허구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감독은 이로써 기우가 성공하는 장면이 불가능한 상상이라고 암시하며 한국 사회의 수직구조를 한번 더 보여줍니다.
희망적 존재 또한 플란다스의 개에만 등장합니다. 전체적으로 사회와 인간의 어두운 면을 밝히는 봉준호 감독의 영화에서 희망적 존재는 눈에 띄는 요소입니다. 플란다스의 개에서 이는 ‘현남(배두나)’으로 나타납니다. 그녀의 내면엔 tv 출연이라는 소박한 욕심이 있을 뿐 야만적이거나 추악한 본성을 숨기고 있지 않습니다. 때문에 할머니의 무말랭이를 거두고, 윤주의 개를 찾아주는 등 눈 앞의 목적에만 충실한 모습을 보입니다. 없어진 윤주의 신발(인간성)을 찾아주는 역할이 현남인 것도 이 때문입니다. 봉준호는 부패한 사회지만 현남과 같이 희망을 걸 인물들도 존재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기생충에서 희망적 존재는 찾을 수 없습니다. 모든 인물들이 철저히 수직으로 이뤄진 계급을 기반으로 사고하고,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봉준호 감독의 작품은 후기로 갈수록 인간 사회의 가려진 부정적 단면에 초점화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기생충은 말할 것두 없조.. 플란다스의 개는 봉준호 감독 데뷔작이었던 것 같은데 재밋읍니다. 익숙한 얼굴들도 많이 등장하시니 심심할 때 보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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